549 한겨레교육

2023 신춘문예의 주인공들

  • 2023.03.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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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배출작가 인터뷰
20231, 신춘문예를 통해 작품을 발표하며 가장 행복하게 2023년을 맞은 수강생 권승섭 시인(동아일보), 양수빈 소설가(문화일보), 그리고 전지영 소설가(조선일보, 한국일보)<[2월 한밤의 문학] 배출작가 낭독회>에서 만났다.



사회자
안녕하세요, 자기소개 부탁드립니다.


권승섭(이하 권’)
안녕하세요. 저는 시를 쓰고 있고요. 권승섭입니다. 학부 재학 중인 학생이고, 다양한 취미를 가진 취미 부자입니다. 베이킹, 그림, 자전거, 사진, 유리공예, 뜨개질 같은 활동을 즐겨 하고 있고요. circular cave(원형동굴)라는 문학구독사이트를 운영하는 동굴의 관리인이자, 쇼의 책공장 계정을 운영하는 공장장입니다.

양수빈(이하 ’)
안녕하세요. 이번 문화일보 신춘문예 단편소설 부문으로 등단하게 된 양수빈이라고 합니다.

전지영(이하 ’)
안녕하세요, 전지영입니다. 앞서 권승섭 시인님이 길게 자기 소개를 해주셨는데 저는 할 말이 없네요. (웃음)


사회자
조선일보, 한국일보 두 군데에서 동시 데뷔를 하셨습니다. 그걸로 충분할 듯 싶습니다. 세 분 요즘 어떻게 지내고 계신가요? 근황이 궁금합니다.



일도 하고 차기작 마감을 위해 글도 쓰면서 지냈습니다. 마침 오늘이 마감일이라 송고하고 왔습니다.


사회자
생각보다 굉장히 이르게 청탁이 오고 마감까지 하셨네요. 당선 이후로는 첫 발표신가요?



. 첫 발표였습니다. 후련하기도 하고 떨리기도 하네요.


저도 감사하게도 여러 청탁을 주셔서 열심히 작품을 발표하고 있고요. 최근에는 여러 낭독회를 준비하면서 지내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곧 개강이라서 열심히 작품 준비를 했고요. 작년 이맘때부터 희곡에 관심이 생겨서 열심히 써왔는데 최근에 희곡 공부도 하면서 발전을 시키고 있습니다. 또 동화에도 새롭게 도전을 하고 있습니다. 등단 이후로 시인이라고 불리고 있기는 하지만, 요즘은 시 이외의 것들을 다양하게 하고 있습니다.


저는 청탁 받은 글 쓰면서, 예전 글을 한 편씩 다듬고, 새 글도 쓰고 있습니다.


사회자
예전 글이라는 말이 나와서 말인데, 전지영 작가님 저희 센터에서 오랜 기간 정말 많은 수업을 들으셨어요. 그리고 투고도 정말 많이 하셨다고 알고 있습니다. 혹시 그간 쌓인 작품이 몇 편 정도 되실까요?



부끄럽지만 30편 정도 될 것 같습니다.


사회자
30편 습작하면 등단한다, 네 메모해두겠습니다. 2023년을 가장 행복하게 맞으신 세 분이 아닐까 싶습니다. 당선 당시의 기분, 소감에 대해 말씀해주신다면요?



당선 전화를 받을 때는 사실 아무런 기분이 들지 않았어요. 다른 문학상이나 공모전 당선 전화와 비슷하구나 싶었어요. 나중에 들은 얘기인데 다른 분들과 다르게 제가 너무 무덤덤해서 기자님도 놀라셨다고 하시더라고요. 그런데 전화를 끊고 기쁨이 서서히 몰려오더라고요. 등단이 꿈이 될 수는 없겠지만 그래도 데뷔라는 목표 하나를 이뤘다는 생각에 이틀 정도는 붕붕 뜬 상태로 있었고, 동시에 많은 걱정과 불안도 밀려왔습니다. 너무 어린 나이에 등단을 하게 된 것이 아닌지, 앞으로 청탁 마감과 다른 활동들을 어떻게 해 나가야 할지 고민도 많았습니다.


처음 당선 전화를 받은 순간에는 진부한 표현이지만 심장이 터질 것 같았습니다. 전화를 끊고 난 후에야 천천히 실감이 나기 시작했던 것 같아요. 늘 꿈꿔왔던 일이라 행복하면서도, 제가 걱정이 많은 편이라 한편으로는 앞으로 어떤 글을 써야 좋은 작가가 될 수 있을지에 대한 고민이 덜컥 들어 두려운 마음도 들었어요.


그 순간 만큼은 아드레날린이 폭발하는 기분이었습니다. 그런데 평소처럼 배도 고프고, 잠도 왔어요. 일상은 달라진 게 없달까. 사실 지금 돌이켜 생각해보면, 기쁨은 찰나에 지나갔고, 압박에 잠 못 이루는 날만 계속 이어졌습니다.


사회자
다시 한 번, 너무 축하드리고, 세 분 다 불안과 설렘이 공존하는 나날을 보내신 것 같은데 늘 화창한 날들이 펼쳐지기만을 기도하겠습니다. 이쯤 해서 10분 분량의 낭독 부탁드립니다. 소설은 두 부분을 낭독하시고, 시는 3~4편 정도 낭독해주시면 됩니다. 소설의 경우 시간 관계 상 전문을 읽을 수 없으니 간단히 소설에 대한 소개도 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소설--소설의 순서로 진행하면 좋을 것 같은데요. 양수빈 작가님께서 당선작 <낮에 접는 별>의 일부분을 먼저 낭독해주시겠습니다.



인문학 클래스에서 만난 세 명의 인물이 서울 근교를 돌아다니며 각자의 과거를 되짚어보는 이야기입니다.
-
* 양수빈 소설가 낭독

(1)
3p
홍주가 천천히 숨을 내쉬었다.’
~
5p
아주 오랜만에 만난 가족이라서요.’

(2)
9p
동우가 안내한 빵집은 명동역 안에 있었다.’
~
11p
홍주는 아무에게도 들리지 않을 만큼 작은 소리로 무언가를 끊임없이 중얼거리며 멈추지 않고 걸었다.’

(사회자 : 너무 아쉬운데요. 잠깐 소설의 구절을 빌리겠습니다. ‘거의 다 됐어요.’ 끝까지 읽어주시죠.)

~
12p
휘리릭 봉지를 뒤집은 동우가 거의 다 됐어요, 하고 홍주에게 격려하듯 말했다. ()
-
사회자
저는 작가의 낭독을 참 좋아하는데요. 소설이든 시든 작가와는 다른 화자를 내세우지만, 문체는 작가의 목소리를 참 많이 닮는 것 같습니다. 사실 저희가 문장 훈련은 해도 목소리 훈련을 하는 사람들은 아니다 보니 낭독에서만큼은 거짓말을 못한다는 생각도 드는데요. 그런 면에서 낭독을 들으면서 더더욱 소설에 깊게 빠져들 수 있었는데, 작가님이 이 부분을 선택해서 낭독해주신 이유는 무엇일까요?



1번의 경우 세 사람의 첫 만남이자 동행의 시작이라서 선택했습니다. 2번은 홍주가 품고 있는 여러 감정의 파동을 보여주는 장면이자 동우가 홍주에게 자신의 상처를 털어놓고, 홍주도 자신의 상처를 드러내며 서로 위로의 정서를 나누는 장면이라 선택했습니다.


사회자
결말 부분 이어서 낭독을 부탁드린 이유가 이 소설의 진정한 의미가 결말에서 나온다고 생각했기 때문인데요. 뽑아주신 부분의 키워드인 만남위로‘를 대하는 방식에서도 세 인물의 캐릭터가 너무 매력적이었고 동우노부인홍주를 위로하는 방식이 애틋하면서도 아름다웠습니다. 전체적으로 작품에 대해 되짚어보자면, 인문학이 없어지는 시대에서 삶을 아는 인문학 원데이 클래스라는 수업을 들으러 갔다가 만난 세 사람의 짧은 여로 소설입니다. 세 사람 모두 불가해한 고통들을 겪은 전사前事가 있고, 동우, 선린도 홍주와 마찬가지로 홍보 포스터에 있는 겹쳐진 삶의 단면을 펼쳐보는 방식이라는 말에 끌려온 것 같기도 했는데요. 어떻게 떠올리게 된 이야기일까요?



처음 원데이 클래스라는 소재를 떠올린 것은 순전히 저의 취향 때문이었는데요. 한때 온갖 원데이 클래스에 관심을 가지고 있던 시기가 있었고 그때 원데이 클래스에서 만나 하루를 같이 보내는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를 쓰고 싶다고 생각했어요. 또 인문학은 인간의 근원적인 문제와 가치를 탐구하는 학문이잖아요. 말씀처럼 인문학이 사라지는 시대이지만 인간이라는 존재가 살아있는 한 인문학이 완전히 소멸할 수는 없다고 생각하거든요. 홍주와 선린, 동우는 저마다의 상처를 간직한 인물이고 그것을 꼭꼭 숨긴 인물인데, 어쩌면 그 아픔을 펼쳐 마주하기 위해 인간과 삶 자체에 대해 알고 싶었던 것은 아닐까, 그래서 삶을 아는 인문학 원데이 클래스’, ‘겹쳐진 삶의 단면을 펼쳐보는 방식이라는 말에 끌렸던 것은 아닐까 싶습니다.


사회자
한 명의 주인공 시점이지만 소설에서 깊이 들여다보는 캐릭터가 홍주, 선린, 동우 셋이고 세 캐릭터 모두 매력적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한편으론 다소 스포트라이트가 흩어질까 걱정 하셨을 수도 있을 거 같은데, 어떤 마음으로 캐릭터를 만들어 나가셨나요?



초점 화자를 홍주로 두고, 선린과 동우라는 인물을 배치하면서 가장 염두에 두었던 부분은 선린과 동우를 단순히 소모적인 인물로는 만들지 말자, 였습니다. 홍주의 상처를 보여주거나 풀어가기 위해 두 인물을 소품처럼 배치하고 싶지는 않았어요. 그래서 도리어 세 인물 고루 스포트라이트를 받을 수 있도록 신경썼던 것 같습니다.



사회자
처음 낮에 접는 별이라는 제목을 보았을 때, 동화를 잘못 보내주신 건가...? 싶은 생각도 들었습니다. 소설을 다 읽고 든 생각은, 여기서 중요한 어절은 낮에’, ‘보다는 접는다는 행위가 아닐까 싶은데요. 접었을 때 겹쳐질 수 있고, 접었을 때 새로운 의미가 만들어지면서 마침내 별이든 무엇이든 된다는 게, 삶과 만남, 죽음 같은 큰 이야기들을 상징하는 것으로 보였어요. 그리고 '가위'는 마치 엄마나 정리한 가게(다파랑)의 유품 같았습니다. 지금은 홍주의 강박, 불안, 자해적인 소품으로 쓰이고 있지만 추후에는 홍주가 인생 접기, 펴기를 할 때 종이접기의 그것처럼 큰 힘이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말씀처럼 제목에서 중요한 것은 접는다는 표현인데요, 동우는 별을 접었지만 선린과 홍주는 다른 것을 접어볼 수도 있겠죠. 저는 이게 우리의 삶과 같다고 생각해요. 빵 봉지에 적힌 글자를 알아볼 수 없게 되고, 이윽고 완전히 다른 모양이 될 때까지 접고 접어 새로운 별을 만들어보이는 것. 우리에게 주어진 것을 각자의 힘으로 전혀 다른 것으로 변화시키는 것이 삶이자 삶의 순리가 아닐까 그렇게 생각했어요. 가위는 홍주의 상처를 상징하기 위해 넣은 소재인데요, 처음에는 가위에 상처를 입은 홍주가 동우와 위로를 주고받고 연대를 느낀 후에는 따끔한 감각만 느낄 뿐 베이지 않은 것은 상처를 치유하는 과정에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해서였습니다. 그런데 저는 가위가, 상처가 마냥 나쁜 것만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아요. 어떤 상처와 시련은 우리를 더 강하게 만들기도 하니까요. 꼭 강해질 필요는 없지만, 그런 경험이 있는 사람들은 또다시 시련이 닥쳤을 때 똑같이 무너지지만은 않더라고요. 그런 의미에서 질문해주신 것처럼 가위가 홍주의 앞으로의 삶에 있어 힘으로 작용할 수도 있겠네요.


사회자
, 말씀 잘 들었습니다. 이번에는 권승섭 시인님의 다섯 작품 중 세 작품, <차분하게 웃으려면>, <개의 서사>, <하얀 연못>을 들어보겠습니다.

-
* 권승섭 시인 낭독
<차분하게 웃으려면>
<개의 서사>
<하얀 연못>
-
사회자
시는 여전히 누구에게나 어려운 장르 중 하나인데요. 무엇보다도 생략과 함축이 시의 주요한 동력이라서 그런 것이겠지요. 저는 시인님의 낭독을 들으면서 호흡과 간극이 훨씬 잘 살아나면서 많은 부분이 이해되었던 것 같습니다. 특히 <차분하게 웃으려면>에서는 찰나에 집중하면서 순간을 포착하고, 이어진 사유들로 순간을 완성시키는 게 낭독에서 더더욱 잘 드러났고요. <하얀 연못>, <개의 서사>에서도 말하지 않은 것들, 즉 환상성을 간직한 부분들의
행간이 더욱 잘 이해가 되었습니다. 이 세 시를 선택하신 이유가 무엇일까요?


우선 당선작인 <묘목원>은 기사로 많이 접하셨을 것 같아서 미발표작인 투고작 세 편을 골랐습니다. 사실 <묘목원>은 투고작 다섯 편간의 균형을 맞추기 위해서 중간에 넣어뒀던 시였거든요. 그래서 다른 느낌의 시들도 보여드리고 싶어서 세 편을 골랐습니다. 말씀하신 것처럼 시는 그렇기 때문에 독자에 따라 다양한 해석들이 가능하고 쓰는 사람의 입장에서도 독자의 반응을 관찰하면서 재밌는 것 같아요.


사회자
낭독은 하지 않으셨지만 <묘목원>, <일상과 소품> 같은 작품을 보면, 물음에 대꾸를 않는 화자가 나와요. 그렇지만 대답 부탁드립니다. (웃음) 시는 말하지 않음으로써 말하고, 말함으로써 말하지 않는 장르입니다. 행갈이, 연갈이, 그리고 문장과 문장 사이에도 무엇을 말하고, 무엇을 말하지 않을지 선택하는 과정에서 평소나 이번의 시들에서 어떤 고민들을 하셨을까요?



저는 평소에 시를 쓸 때 여백과 호흡을 살리는 방식을 좋아하는데요. 세상에는 고요도 있고, 적요도 있고, 침묵도 있지만 그것들이 완전하지는 않다고 느껴요. 그러니까 침묵을 하더라도 그 안에서 무수히 많은 생각과 기분과 마음들이 바글거리고 있다고 느낍니다. 그래서 당선작인 <묘목원>에서 화자가 계속해서 대답을 하지 않는 것도 일종의 표현방식으로 여기며 시를 쓰게 되었습니다. 당선작 후기를 보니 많은 분이 굉장히 다양한 방식의 해석을 해주셨더라고요. 많이 말하지 않고, 할 수 있는 만큼만 시에 녹이고, 언어를 최소화하는 것들이 다양한 해석을 만들지 않았나 싶기도 해요. 저는 여지를 많이 두는 시 쓰기를 좋아하기도 하는데 늘 다양한 해석이 가능한 시를 쓸 수 있도록 노력하고 있기도 합니다. 읽는 사람의 마음 상태에 따라서 다르게 읽히는 시를 쓰고자 많이 고민하는 편입니다.


사회자
순간을 포착한 다음 따라붙는 진술, 정의를 지루하지 않고 독창적으로 잘 쓰셨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예를 들자면


손댈 수 없는 바닥을 내려보며 잠시 망설인다 찰나가 모인다 빠르게 돌린다

까지만 했어도 충분한데

그것이 영화의 시초라 불렸다

이런 문장들이 다소 엉뚱하면서도 시를 한 층 더 깊은 영역까지 이끌고 있다는 생각을 했어요. 좋은 예술가는 이쯤 됐겠지, 싶은 순간 한 번 더 치고 들어가는 힘이 있어야 하고, 그것이 결국 순간을 영속시킨다고 알고 있는데 주로 장면을 어디서 가져오고, 그것을 볼 때 엉뚱하거나 철학적인, 혹은 역사적이거나 인문적인 생각들을 하는 편이실까요?


소개 때 취미 부자라고 저를 소개했는데, 저는 망상 부자이기도 해요. 저는 상상력이 풍부한 사람은 아니지만, 꼬리에 꼬리를 물고 생각을 하는 버릇이 있습니다. 그래서 아마도 말씀하신 문장과 같은 표현이 나왔던 것 같아요. 그런 표현들은 끝말잇기를 하듯이 생겨나고는 하는데, 같은 글자의 단어를 이어서 꺼내는 것이 아니라 같은 의미의 이야기를 잇는 기분을 시를 쓰며 느끼고는 해요. 또 저는 매일 일기를 쓰고는 하는데 그런 것들을 보면서 일상 안의 사유 지점들을 발굴하게 되기도 합니다. 또 사유가 먼저 시작되기보다는 시가 먼저 시작되면 다양한 사유와 상징이 다가와서 달라붙는 것 같기도 해요.


사회자
주로 시에 화자 외에 다른 인물은 잘 나오지 않고 나오더라도 그것이 사람인지도 잘 모르겠고, 결국에 생물과는 소통이 안되고 있는데. 한편으로는 의물화된 물건이나 자연들이 화자의 안과 밖을 마음대로 드나들면서 소통하지 않아도 아는 수준으로 화자와 물아일체가 되고 있습니다. 이런 결과가 되기까지 평소 어떤 체험들을 하고 무엇을 읽으시는지 알고 싶어요. 혹은, 이 시들 중 이건 정말 체험적으로 쓴 것이다가 있다면요?



우선 저는 제 시에 굉장히 많은 인물이 바글거린다고 자주 느끼는데 뜻밖의 감상을 이야기해주셔서 제 시에 대해 새로운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아무래도 시는 를 이루는 세계에 천착하기에 화자의 이야기가 주를 이룬다고 느끼셨을 수 있을 것 같아요. 또 의물화에 대해 언급해주셨는데 시는 소설이나 주변 장르보다는 불가능하고 넓은 이야기에 도달하기 쉬운 특징을 가지고 있다고 느껴서 그런 지점을 살리려고 노력하고는 합니다. 투고작 중 체험적으로 쓴 시는 다섯 편 모두인 것 같아요. 물론 모든 내용이 체험적인 것은 아니지만 <차분하게 웃으려면>에서는 유리컵을 깨며 어떤 진공 상태의 시간을 느꼈던 경험, <하얀 연못>에서는 화장실은 왜 깨끗함과 더러움이 공존하는 공간일지에 대해 낯선 기분을 느꼈던 경험, <개의 서사>에서는 어릴 적 철길 앞집에 살며 떠돌이 개를 많이 보았던 경험, <일상과 소품>은 같은 방법으로 공예품을 만들었지만 결과물이 다른 경험에서 출발한 시들이에요. 그러니까 시를 이루는 모든 내용이 체험적이라고 할 수는 없지만, 일상 안의 체험으로부터 시가 자주 출발하고는 합니다.


사회자
, 말씀 감사합니다. 알면 알수록 시는 정말 매력적인 장르가 아닐까 싶습니다. 여기서 더 첨언하기보다는, 하신 말씀을 잘 떠올려보며 <묘목원> 앵콜을 부탁드리고 싶습니다.

-
* 권승섭 시인 낭독
<묘목원>
-
사회자
다음은 전지영 작가님의 <>, <난간에 부딪힌 비가 집안으로 들이쳤지만> 낭독을 부탁드립니다.



<>는 해군 남편을 둔 주인공이 관사에 살면서 겪은 일에 대해 쓴 작품이고, <난간에 부딪힌 비가 집안으로 들이쳤지만>은 공무원 남편과 아내가 아이를 잃고 난 후부터 겪는 상실의 아픔에 대해 이야기하는 소설입니다.
-
* 전지영 소설가 낭독

<>

(1)
1p
‘J시 해군 관사 단지는 21층짜리 아파트 총 열 한 개 동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
2p
그건 관사 여자들에게 언제나 곤란한 일이었다.’

(2)
10p
그날 밤, 윤진은 밥을 먹는 남편에게 쥐가 있다는 소문에 대해 말했다.’
~
12p
아무것도 뚜렷하게 보이지 않아서 두려움은 점점 더 커졌다.’

<난간에 부딪힌 비가 집안으로 들이쳤지만>

(1)
7p
윤석이 집에 돌아왔을 때, 혜경은 식탁에 앉아서 커피를 마시는 중이었다.’
~
9p
‘A의 아내는 혜경과 눈을 똑바로 맞춘 채 깔깔 소리내어 웃었다.’

(2)
14p
다음 날 아침, 혜경은 사격장에 가지 않았다.’
~
-
사회자
너무 잘 들었습니다. 저는 작가님의 소설이 감정의 진폭이 큰 사건들을 담담하게 서술하는 데 일가견이 있다고 생각하며 작품을 읽었는데, 들었을 때는 사뭇 다른 것이 또다른 매력 같습니다. 이 부분을 선택하신 이유는요?



<>의 경우 (1)은 제가 공간을 묘사하는 데에 공을 많이 들이는 편인데, 직접 그림을 그리거나(잘 그리지는 못하지만), 비슷한 사진들을 모아놓고 계속 보면서 동선을 그려보기도 하고요. 관사는 공간이 상징하는 바가 굉장히 뚜렷해요. 그 자체를 잘 그리는 것만으로도 소설 기저에 계급성과 폐쇄성을 잘 보여줄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2)는 윤진의 감정이 고조되면서 긴장감 역시 고조되는 부분입니다. 남편은 이 문제를 덮는 것에 문제를 느끼지 않아요. 그러나 윤진은 그게 정말 옳은 걸까, 의문을 갖게 됩니다. 이 소설의 주제, 쥐의 상징성을 가장 많이 함축하고 있는 부분이기도 하고요. 남편은 쥐는 어디에나 있다고 말하죠. 그럼에도 불구하고 남편은 (윤진의 가족) 앞으로도 편안한 삶을 영위할 거라고 예상할 수 있기도 합니다. 윤진은 여기서 어떤 선택을 해야 할 지 혼란을 느낍니다. 결론적으로 현실의 삶을 유지하는 방향이 되었지만요.

<난간에 부딪힌 비가 집안으로 들이쳤지만>의 (1)의 경우에는 처음부터 윤석의 시점으로 진행되는 서사가, 혜경의 시점으로 변하는 장면입니다. 처음 이 글의 구조를 설계할 때, 두 사람의 시선을 모두 보여줘야 하는지, 한 사람의 시선으로 이야기를 끌고 가야 하는지 고민을 많이 했어요. 결론적으로는 두 시점을 교차해서 보여주는 방식을 택했는데요. 제 입장에서는 이 두 사람의 내면을 모두 보여주기 위해서 어쩔 수 없이 선택해야 하는 기술적인 장치였습니다. (2) 윤석이 마침내 스스로 속이고 있었던 진심과 대면하는 장면입니다. 우리는 아무리 힘들어도 죄책감과 마주해야 하며, 앞으로 살아갈 삶에서 증오와 죄책감에 함몰된 채 살 수는 없다고 말하는 부분입니다. 이런 이유로 낭독한 부분들이 소설 전체에서 시사하는 바가 커서 선택하게 되었습니다.


사회자
소설 고수들만 한다는 교차 시점을 쓰셨네요. (웃음) 두 편이라 세 질문 안에 끝날 수 있을까 모르겠지만... 정말 궁금합니다. 혹시 여군 출신이시거나 가족 중에 군인이 있으신가요? 너무나 핍진하게 묘사되는 관사 내의 삶이 있는 랄까. 공무원 남편을 둔 주인공이 사격장에 총을 쏘러 다니는 난간에 부딪힌 비가 집안으로 들이쳤지만에서 보이는 핍진함이 충분히 작가의 직업에 대한 의심을 불러일으켰습니다.



여군은 확실히 아니고요. (웃음) 진해에 산적은 있습니다. 진해는 해군사관학교와 기지, 미군부대가 위치한 곳이에요. 제게는 여전히 해군 관사에서 생활하는 친구들이 여럿 있습니다. 그것까지만 말씀드릴게요. (웃음) 사격은 잘 할 줄은 모르고요. 가끔 스트레스 풀 때 한 번씩 근처 사격장에 공기소총이나 클레이사격을 하러 갑니다. 안간지 좀 됐어요. 생각보다 근력이 필요한 종목이라 열 발 중 한 발도 못 맞출 때도 있고요. 마지막 되면 팔 힘이 다 풀려서 총을 들고 서 있는 것 자체가 힘들더라고요. 사실 다른 작가님들도 비슷하겠지만, 소설을 쓸 때, 살면서 산발적으로 경험한 내용을 모아서 쓰잖아요. 작가가 모든 일을 경험할 수는 없으니까 아무래도 저에게 가까운 경험을 끌어와서 사용하면 디테일에서 생기를 불어 일으키기 쉬운 것 같아요. 장소라면 외관의 모양뿐만 아니라 벽의 질감이라든지 소리라든지 온도라든지 냄새라든지. 그런 것들이요. 그런 디테일에서 종종 소설의 정서가 발생하기도 하고요.


사회자
직장 내부 부조리가 있고, 그것을 침묵하거나 고발하고, 양심의 가책을 느끼거나 희생당하는 일련의 과정들, 파괴되거나 위태롭게 존재하고 있는 가족이 안타까웠고, 그 과정에서 암묵적 희생을 강요당하는 건 결국 여성들이었거든요. <>의 윤진이 나이가 더 들면, <난간에 부딪힌 비가 집안으로 들이쳤지만>혜경처럼 될 거 같다는 생각도 했고요. 봉건시대에 이런 말이 있었잖아요. ‘가정이 파괴되면 사회가 파괴되고~’, ‘가화만사성등의, 결국 가족 구성원들 개개인의 희생을 암묵적으로 강요하는 말들. 저는 이게 가정 외부 활동보다는 내부 활동이 많았던 그간의 여성들을 억압해온 말이라고도 생각하면서 이 소설을 읽었는데, 쓰신 소설들에서는 가정이 바르지 못해 사회가 파괴되는 것이 아니라, 사회가 바르지 못해 결국엔 가정이 파괴되고 있습니다. 작가님이 생각하시는 바른 세상과, 공동체(직장)의 윤리에 대해서 들어보고 싶습니다.



바른 사회라는 말이 깊은 생각을 하게 만들었습니다. 실은 바른이라는 단어가 가진 의미 자체가 조금은 저를 숨 막히게 하는 면이 없지 않고요. 그렇지만 제가 생각하는 꽤 괜찮은 사회가 무엇인지 고민해보니, 저는 개인이 진화하는 사회라는 결론에 다다랐어요. 이건 제가 20대 때 인상 깊게 읽었던 한 논평집의 제목이기도 합니다. 제 소설의 등장인물은, 그래서 남녀노소로 구분되기 전에 하나의 억압된 개인, 궁지에 몰린 개인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윤진혜경뿐 아니라 실은 윤석역시 개인 뒤에 숨어있는 시스템의 피해자입니다. 우리가 경계해야 할 것은 타자 이전에 사회 내부에서 개인을 교묘하게 움직이는 시스템이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이러한 시스템의 불온함에 대응하려고 노력하는 인간, 그런 개개인이 모이는 사회가 이상적이고, 꽤 괜찮은 사회라고 생각합니다. 공동체의 윤리도 같은 선상에서 생각해볼 수 있는데요. 우리는 단체 혹은 패(패거리)’연대를 구분해야 하고, (거리)는 배타성에 의존하고 연대는 개인의 공감에 기초한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연대가 가능한 집단 혹은 공동체가 희망적인 것 같습니다.


사회자
<>를 보면, 선박 사고에 양심의 가책을 느끼고 전역한 군인 남편을 둔 착할 ’, 침묵하고 소문을 퍼뜨리는 오는 그르칠 가 맞나요? 그리고 저는 <난간에 부딪힌 비가 집안으로 들이쳤지만>에 나오는 혜경의 남편인 윤석도 자꾸 누군가가 떠오르는 것이...(웃음) 여기 한겨레라서 이 정도 얘기는 하셔도 될 거예요 아마(웃음) 주인공은 아니었기에 스포트라이트는 덜 갔지만 매력적이었던 캐릭터 소개를 조금 들어보고 싶습니다.



저는 작중 인물 이름에는 크게 의미를 두지 않는 편인데, <>의 경우는 어느 정도 이름이 주는 이미지와 캐릭터의 성격에 묘한 비슷한 점이 있다고 생각했나 봅니다. 사회자님의 질문을 보고 아, 저도 그런 이미지를 떠올려서 이름을 지었구나, 되려 깨달았습니다. ‘은 관사 여자들과 같은 무리에 있다가 남편이 겪은 일을 통해 가장 먼저 피해를 보고 각성하게 되는 인물입니다. 쥐를 잡는 사모가 기억하는 과거 함장의 부인을 생각나게 하고요. ‘양심을 지키기 위해 안위라는 대가를 치르면서, 결국 공동체에서 축출되는 인물입니다. 쥐 잡는 사모가 미래의 윤진이라면, 대령의 사모는 이겠죠. ‘는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 그저 이 공동체가 옳다고 생각하는 인물입니다. 사실 관사 사는 사람 대부분 이런 사람이겠죠. 왜냐하면 편하니까. 의문을 품는 건 불편하고 더 나아가 고통스러운 일이 될 수 있습니다. 무언가 중요한 것을 잃거나 대가를 치를 수 있는 문제죠. 거기에 대해 가치 판단 없이 사는 같은 사람이 실은 집단에서 가장 편한 인물이라고 볼 수 있어요. 제가 이 소설에서 조금 아쉬운 부분은, 이러한 관행이 계속해서 되풀이 되었을 때, 여자들은 그저 사라지는 걸 선택한다는 점이에요. 왜 이들은 아무것도 하지 않을까, 무언가 해야 한다면 어떤 일을 할 수 있을까, 소설이 거기까지 나아가지 못해서요. 앞으로 계속 고민해야 할 부분이라고 생각합니다.

<난간에 부딪힌 비가 집안으로 들이쳤지만>은초고를 쓴 게 6년 전이고, 지속해서 고쳤기 때문에 그분들이 부상하기 이전에 지어진 이름이긴 해요. 한 번은 합평에서 같은 이야기를 듣고 고치려고 생각했는데, 아무래도 6년 동안 주었던 이름을 바꾸기가 쉽지 않아서 그대로 두었습니다. ‘윤석은 실은 이 소설의 주인공이에요. 서사의 상당 부분이 윤석의 시점으로 진행되고 있습니다. ‘혜경이 총을 쏘니까 강렬하긴 한데, 실은 윤석에서부터 이야기는 시작되었습니다. 퇴직한 남자들이 무얼 제일 많이 할 것 같나요? 의외로 아침마다 신문 보는 일이더라고요. 그리고 집안일 참견. 그들은 퇴직 후 넘치는 시간을 어떻게 다루어야 할지 잘 모르는 사람들이에요. 한평생 직장에 메어 있었으니까요. 아마 자신이 이루어 놓은 업적(?)에 대해 가장 많이 회상하는 때이기도 한 것 같습니다. 젊은 사람들 입장에서는 듣기 고역일 수 있겠지만, 그들에게는 오랜 시간 일했다는 자부심이 분명 있을 테니까요. 윤석은 그런 전형적인 캐릭터입니다. 그는 공직에 오랜 시간 몸 담았던 사람이어서, 타인과 불편한 관계를 만드는 걸 싫어해요. 그래서 자신의 불행을 다루는 방법으로 먼 곳에 보이지 않는 표적에 비난의 화살을 쏘아대는 행위뿐이에요. 심지어 그게 옳다고 믿기도 하죠. 생각해보면 그런 어른들 많아요. 먼 곳에서 이유를 찾는 건 쉬우니까요. 진짜 원인을 찾으려면 자신을 들여다봐야 하는데, 그건 꽤나 고통스러운 일입니다. 누구에게는 죽을 때까지 불가능 한 일이기도 합니다. 이 소설이 왜 하필 정년퇴직 이후에, 아들이 죽은 지 한참 만에 시작되었는지 고민해야 했어요. 저는 거기에 분명 퇴직 후의 바뀐 일상, 넘치는 시간과 그래서 겪는 가까운 사람과의 갈등이 이유가 될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A 시장윤석과 다르게 누가 봐도 도덕적 결함이 많은 사람입니다. 그런 ‘A 시장의 아내가 겪어야 할 삶이 사실 범인인 저로서는 가히 짐작이 되진 않습니다. 이런 부부는 어떻게 사는지 궁금하잖아요. 소문만 무성한 유명인 부부들이요. 그녀 역시 혜경과 마찬가지로 남편을 죽이고 싶을 정도로 증오하는 것 같습니다만, 막상 윤석이 실종되었을 때, 신고를 한 것은 아내입니다. 혼란스러운 것 같아요. 남편이 가져다주는 명예와 경제력에서 비롯된 안락함이 분명이 있을 테고, 그걸 취하는 삶을 버리기 힘든 사람입니다. 우리는 운동 방향을 바꾸는 걸, 지속하는 것보다 훨씬 힘들어하니까요.


사회자
세 분 낭독과 작품에 대한 깊은 말씀들 잘 들었습니다. 세 분 모두 한겨레에서 수업을 들으셨고, 많은 선생님들에게 오랜 기간 수강을 하신 분도 있습니다. 그간 습작을 하시며, 수업을 들으시면서 기억에 남는 일화가 있다면요? 정말 이 순간 때문에 다시 한번 도전할 수 있었다는 감동 포인트가 있다면요?



저는 유진목 시인의 시 수업을 들었어요. 저는 중학교 때부터 문예창작과에서 생활하고 있기도 하고 여러 외부 수업을 들었던 터라 색다른 강좌를 찾고 있었어요. 그때 유진목 시인의 수업을 발견하게 되었는데 몸을 움직이며 하는 수업이었어요. 매주 요가매트를 가져가서 몸을 움직이며 시를 쓰고, 시를 녹음해서 듣기도 했는데 생각해보면 참 엉뚱한 수업이었습니다. 수업 때 상반신과 하반신을 우스꽝스럽게 비틀며 무용을 하듯 몸을 움직이기도 했고, 사람들이 오가는 대로변에서 시를 녹음하기도 했거든요. 각자의 유작을 쓰기도 했고 다양한 활동을 했던 기억이 나는데, 강독과 합평에서 벗어난 새로운 활동을 하면서 시를 다른 관점에서 보게 된 것 같기도 합니다.


사회자
저희가 몸 쓰는 걸 좀 싫어하는 경향이 있잖아요? 강좌의 진입 문턱이 좀 있다 보니, 그리 잘 되는 강좌는 아닌데 너무 좋은 강좌라서, 권승섭 시인님을 통해 강좌가 인기가 많아지면 좋겠습니다. 전지영 소설가님은요?



저는 다양한 선생님의 수업을 정말 많이 들었습니다. 여기 있는 테이블 몇 개는 제 수강료가 보탬이 되었을 수도 있어요. (웃음) 코로나 이후 줌 수업과 현장수업을 병행한 적도 있고요. 정말이지 코멘트 하나라도 더 들으려고 애썼던 것 같습니다. 소설이 발표되어 좋은 점은 제가 애쓰지 않아도 여기저기에서 피드백과 해석이 쏟아진다는 점이에요. 강영숙 선생님 수업을 굉장히 오래 들었는데요. 항상 첫 시간에 소설 쓰는 자세에 대해 이야기 해주세요. 장기 수강생들끼리는 정신교육 시간이라고 부르는데요. (사회자 : 정말 군인이 아니셨다는 말이죠?) 소설은 기술이라는 점부터, 마음만 가지고는 안 된다, 써야 한다, 라든지 소설 쓰는 자신을 사랑해야 한다,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무의한 행위라고 하더라도 소설이라는 장르의 힘을 믿으라는 말이라든지. 이런 이야기들은 추상적으로 들리지만, 제가 왜 소설을 쓰는지 그 본질적인 부분을 잊지 않게 도와줬습니다. 수없이 투고하다보면 사실 투고와 등단이 글 쓰는 단 하나의 목적이자 목표처럼 느껴지는 때가 있습니다. 그러면 쉽게 지치는 것 같아요. 그때마다 정신교육 시간에 노트 테이킹 해 놓은 말들을 반복해서 읽어보곤 합니다. 또 하나는 김이설 선생님 줌 수업 때 있었던 일인데요. 선생님은 수업이 끝나시면 코멘트를 원고 출력본에 일일이 손으로 써서 우편으로 보내주세요. 그때 시집 한 권과 메모를 받았어요. 그때 포스트잇에 이렇게 메모해 주셨어요. 종교가 있으시다면 신에게 기도하는 것 밖에 할 일이 없으실 듯합니다.’ 라고요. 제 글이 그렇게 좋은 것도 아니었는데, 그 쪽지를 받고 이상하게도 힘이 났어요.


사회자
이미 너무 잘 쓰시니 이제 더 이상 인간으로서 할 수 있는 것은 없고 신이 도와주기만 하면 된다...?



아뇨, 그런 말은 아니지 않을까요? (웃음) 그냥 응원의 차원이었던 것 같습니다.


사회자
그럴까요? (웃음) 답은 김이설 선생님만 알고 계시는 걸로. 양수빈 소설가님은요?



나름 글을 오래 쓰면서, 나는 왜 쓰는 걸까에 대한 고민을 했어요. 글 쓰는 일은 너무 즐겁고 행복하지만, 동시에 괴롭고 고통스러운 일이기도 했거든요. 더군다나 회사를 다니면서 수업과 병행하려니 벅차기도 하고 귀찮은 마음이 들 때도 있었죠. 수업을 하면 여러 유형의 분들이 오시잖아요, 오래 글을 쓰신 분도 있고 전공자와 비전공자도 있고 글을 아예 처음 쓰시는 분도 있고. 그런데 다들 하나같이 바쁜 일상에서도 일주일에 하루 있는 수업을 기대하고 기다리시는 게 보였어요. 수업 참여도 열심히 하시고요. 유난히 특이한 일이 있었다거나 어떤 에피소드가 있었던 것은 아니지만, 그냥 그런 모습들을 보면서 글을 대하는 저의 마음가짐이나 태도를 다시 다잡을 수 있었던 것 같아요. 글을 사랑하는 사람들과 글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는 이 시간이 소중하고 즐겁다, 이런 일을 계속하고 싶다, 그런 생각이 저를 계속 걷게 했던 것 같습니다.


사회자
사실은 이게 정답이 아닐까 싶습니다. 우문에 대한 현답, 감사합니다. 저희 2023년 캐치프라이즈. ‘누구나 작가가 될 수 있는 곳, 한겨레교육 작가아카데미입니다. 많은 작가님들과 함께 지속적으로 좋은 강의에 대해 고민하고 있으니 계속해서 사랑 부탁드립니다. 다음으로 세 분의 작품에 대한 공통점들을 찾아보려고 합니다. 죽음이 작품의 주요 소재로 다루어집니다. <>에서는 군함과 부딪혔지만 은폐되었던 어선의 실종자들, <난간에 부딪힌 비가 집안으로 들이쳤지만>에서는 주인공 부부의 아들’, ‘시장 A’, <낮에 접는 별>에서는 주인공의 엄마교통사고 피해자’, ‘선린애인의 친구, ‘동우의 형, <개의 서사>에서의 ’. 작가님들이 생각하시는 죽음과, 떠난 자와 남겨진 자들은 어떤 의미일까요?



저에게 죽음은 묘한 감각이라고 할 수 있을 것 같아요. 떠남과 남겨짐, 있음과 없음. 완전하고 완벽한 죽음. 기억의 소멸. 그런 것들에 대해 생각할 때가 많아요. 목숨은 너무 소중해서 하나밖에 없고 각자가 지키며 사는 것이지만, 죽음은 때때로 너무나 쉽게 이루어지고 있다는 생각이 일상 안에서 들 때가 많은 것 같습니다. 다양한 방식으로 다양한 존재가 죽어가는 일들이 끝도 없이 벌어지고 있기도 하고요. 공포 심리와 관련된 뇌 과학 책에서 읽은 부분인데, 인간은 죽음 자체에 대한 공포는 잘 느끼지 않고 죽어갈 때의 고통이라던가 남겨질 사람에 대한 걱정을 한다고 하더라고요. 그래서 죽음은 주위에서 너무 쉽게 일어나지만, 너무 많은 파장을 일으키는 물방울과 같은 힘을 지녔다고 인식하고 있습니다.


저는 예전에는 죽은 사람은 떠난 자고, 산 사람이 남겨진 자라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요즈음은 죽은 사람은 영원히 죽음으로써 남겨진 자들이고, 산 사람이 떠난 자가 아닐까 생각해요. 죽은 이의 기억은(기억이 죽음 이후에도 남아 있다고 가정했을 때) 죽은 순간에서 멈추지만 산 사람은 삶을 살아가며 계속 새로운 기억을 만들어내고 또 그것이 동력이 되어 계속 살아갈 수 있으니까요. 그 과정에서 죽은 이에 대한 기억은 점점 흐려지겠죠. 비록 잊지는 않더라도요. 저는 매 순간 죽음에 걸쳐 있다는 생각을 종종 하는데요, 동전에 앞뒷면이 붙어 있는 것처럼 삶과 죽음도 매 순간 공존한다고 생각해요. 죽음은 별다르지 않고, 누구나 겪을 수밖에 없는 상실이고 그래서 의식적으로 상기하게 되는 그런 게 저에게 있어 죽음의 의미에요.


제 소설에서 남겨진 자는 기억하는 자. 떠난 자는 남겨진 자에 의해 기억되는 자입니다. 남겨진 자는 절대 떠난 자에게서 자유로울 수 없습니다. KTX 역방향을 타고 가면 앞으로 달리면서도, 지나온 길을 볼 수 있잖아요. 그것처럼 남겨진 자들은 내일을 살아가지만, 계속해서 과거를 볼 수밖에 없다는 숙명을 가질 수밖에 없습니다.


사회자
또 다른 지점 하나는 배경이나 소재가 자연’, ‘동물이었다는 점입니다. <>에서는 관사 앞뒤로 위치한 해안과 산, 그리고 작품에 등장하지는 않지만 계속해서 서스펜스를 불러일으키는 바다’, <난간에 부딪힌 비가 집안으로 들이쳤지만>정주못’, 억수 같은 비에 자주 실종되는 사람들, <낮에 접는 별>의 남산, , <하얀 연못>, <묘목원>, <개의 서사>에서 쓰이는 연못, , 나무, , 태풍, 낙엽 등이었는데요. 자연의 거대함과 동물의 무해함에 비해 인간이란 얼마나 유약하면서도 유해한 존재인지 생각해보는 작품들이었습니다. 작가님들께는 어떤 의미일까요?



하루는 어느 심리검사를 한 적이 있었어요. 그때 수치가 굉장히 높았던 부분이 있었는데 세계에 대한 인식과 관련된 지점이었어요. 세계를 굉장히 거대하고 넓게 인식하는 인간 유형이라는 이야기를 들었는데, 스스로가 넓은 세계 안에 작은 점과 같은 존재라고 느껴질 때가 많아요. 작고 연약한 존재라고 느껴질 때도 많고요. 그래서 시를 쓸 때도 어떤 자연의 섭리나 욕망을 따르게 되는 모습이 쓰여질 때도 있는 것 같습니다. 그런 인간들이 점과 같은 존재라고 생각할 때면 아스라한 기분이 들 때가 많고, 점과 같은 존재들에게 너무나 거대한 악함이 있다는 생각이 들 때면 더 아득해지는 것 같아요. 시를 쓰고 있는 스스로도 점에 불과하다고 느낄 때면 한없이 작아지는 것 같습니다.


남산 둘레길을 걸을 땐 길이 끝없이 이어진 것 같고, 길게만 느껴지는데요 결국 그 길에도 끝이 있잖아요. 저는 홍주와 동우, 선린이 회복할 수 없는 상처를 간직하는 인물로 남기를 원하지 않았어요. 길게 난 길을 걷다가 벤치에 앉아 쉬기도 하고, 산책로를 벗어나 갓 나온 따뜻한 빵을 먹으며 마음을 나눌 수도 있기를 바랐어요. 삶이란 그렇게 이어지는 거라고도 생각했고요. 제가 소설의 배경에 남산을 쓴 이유는, 사실 개인적인 이유이기도 한데요, 저에게 가장 익숙한 산책로가 남산이어서였어요. 산책이란 건 그런 거잖아요? 언제든 가벼운 마음으로 집을 나설 수 있고 어느 때고 다시 집으로 돌아올 수 있는 것. 저는 인물들이 그렇게 되기를 원했고 그래서 남산을 배경으로 두었던 것 같아요. 다시 질문으로 돌아오자면, 자연에 비하면 인간은 정말 하찮고 작은 존재처럼 느껴지는 게 맞는 것 같아요. 우연히 만나 남산 길을 걸으며 마음속 감정을 꺼내놓을 수 있었던 것은 결국 자연이라는 배경이 있어서 가능했던 일 같기도 하고요. 그런 의미에서 보자면, 한없이 유약하고 작은 인간은 자연 안에서 비로소 단단해지는 것 같네요.


저한테 자연은 긴장과 공포예요. 비가 올 때 마음이 편할 때는 내가 안전한 거처에 있을 때 뿐이에요. 비가 오는 걸 그저 지켜볼 수 있을 때말이에요. 제가 반지하 비슷한 곳에서 살아본 적이 있는데요. 한 번은 비가 왔는데 낙엽때문에 좁은 하수구가 막혀서 물이 차오르기 시작했어요. 정말 눈 깜짝할 사이에 물이 차오르는 거예요. 손을 모아서 물을 막 밀어내고. 수건으로 둑을 쌓고. 그래도 정말 15분 만에 집이 잠겼어요. 그때 알았어요. , 이건 지켜보는 수밖에 없는 일이구나. 정말 손쓸 수 없는 일이구나. 동일본 대지진이나 이번 튀르키예 지진도 그렇고. 영상으로 접하는 재해의 순간은 그만큼 우리에게 먼 일인지도 몰라요. 감각할 수 없는 공포죠. 우리는 미디어가 제공하는 화면으로 고통을 감각할 뿐이에요. 그래서 그 일을 겪은 당사자의 고통이 온전히 전해졌다고 말할 수 없다고 생각해요. 만약 나는 그만큼 고통스러웠다라고 한다면, 그건 거짓말이라고 생각해요. 그저 타자로서 지켜볼 수 없는 고통이죠. 그 사실을 인식하는 건 우리가 타인의 고통을 다룰 때 몹시 중요한 지점이라고 생각합니다.


사회자
어느덧 2023년이 시작되었습니다. 동료 작가들, 그리고 현재 한국문학의 동시대 작품들에 가장 가깝게 다가서 있는 독자이기도 하신데요. 앞으로의 한국문학, 어떤 지형들이 펼쳐지며 어떤 글이 부상할까요?



이야기하기가 조심스러운 질문이네요. 한국 시집들을 오랫동안 읽고 공부하며 들었던 생각들이 많은데요. 시에서 쓰이는 소재라던가, 시집의 컨셉 같은 것에 있어서 유행하는 것들이 종종 있었던 것 같아요. 어떤 기호라던가, 그림, 사진과 같은 것들이 시집 안에서 다양하게 등장한다거나. 굉장히 긴 분량, 긴 호흡으로 시들이 쓰인다거나. 사람의 이름을 부여하는 시들이나. 최근에는 여름, 빛과 같은 소재들이 시집의 제목이나 시 속에 많이 쓰인 것처럼 새로운 경향들이 앞으로도 유행을 하지 않을까 싶은 생각이 들고요. 창작뿐만 아니라 다양한 플랫폼에 대한 연구도 많은 시인 분들께서 하고 계신 것 같아요. 문보영 시인, 이슬아 작가 이후로 많은 분들이 메일링 서비스를 시작하시고, 시를 영상화한다거나, 문학을 전시화한다거나 다양한 시도들을 보여주고 계신다는 생각이 듭니다.


여기 계신 분들이 모두 그렇겠지만, 저 역시 한국문학을 정말 좋아하는데요, 저는 여전히 내면을 다루는 소설들이 꾸준히 사랑받지 않을까 생각해요. 저에게 있어 소설은 내가 모르는 타인의 내면, 나조차 모르는 나의 내면을 끄집어내고 드러내어 해부하는 과정인데, 그러기 위해선 인물의 내면과 위로, 연대와 관련된 이야기들이 계속 사랑받지 않을까 싶습니다. 작년과 마찬가지로요. 저의 바람이기도 하고요.


제가 감히 뭐라고 말할 수 있는 부분은 아니라고 생각해요. 다만 독자들이 현실보다는 가상 혹은 환상을 다룬 서사에 매력을 느끼는 현상은 조금 생각해봐야 할 지점 같습니다. SF나 판타지 장르에 주목하는 현상은 현실의 분노가 그만큼 크다는 걸 반영하는 거라고 생각합니다. 분노가 분출되는 방향이 현실 서사에서 멀어질수록, 현실의 분노는 더 커지고 있으니까요. 저는 소설이 현실에서 느끼는 분노를 담아내는 도구일 수 있다고 생각해요. 소설의 경향은 우리 사회의 어느 부분이 억압되고 있는지 가늠할 수 있는 잣대라고 생각합니다. 단순히 많이 다루는 소재를 경향처럼 여기기보다는, 그 소재를 어떤 방식으로 접근하고 있는지가 더 중요하기도 하고요.


사회자
, 오늘 긴 시간 수고 많으셨습니다. 작가님들과 함께 한 이 시간, 참석자 분들께서도 아름다운 감각들을 잔뜩 가지고 가셨으면 좋겠고요. 권승섭 시인께서 시 <묘목원>에 나온 어린 나뭇잎을 쿠키로 만들어오셨다고 합니다. 너무나 다정한 시인입니다. (웃음) 여기까지, 누구나 작가가 될 수 있는 곳, 한겨레교육 작가아카데미였습니다.




- 끝 -